조선의 민본주의 실험: 세종대왕이 벌인 5개월간의 전국 여론조사
조선의 건국과 토지 문제: 세종대왕의 공법개혁
토지 문제는 사람이 사는 모든 역사와 공간에서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세값, 부동산 투기, 주택 모기지 대출 등의 이름으로 토지 문제를 경험하고 있으며, 이 문제는 정권을 바꾸고 민생의 질을 결정짓기도 합니다. 조선의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토지 개혁의 양상과 전개를 살펴보면, 토지 문제는 시대와 역사의 공간마다 다양한 문제를 야기해왔고 우리의 삶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같은 문제를 다시 겪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세종이 왕위를 물려받은 1418년은 조선이 건국된 지 26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신생국가였던 조선의 통치자로서 세종대왕은 국가의 모든 기틀을 확립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세금 문제였습니다. 누구에게 세금을 걷어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지의 문제는 공평과 정의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세종은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고, 구체적인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세종대왕의 세금 개혁 의지: 공법의 도입
조선의 관료는 과전법(科田法)에 따라 수조지에서 1/10의 전세(田稅, 토지세)를 월급으로 받았습니다. 문제는 전세의 기준이 되는 수확량이 매년 달라지면서 세금 부과의 공평성이 크게 저하되었다는 점입니다. 매년 수확량을 확인하고 전세의 기준을 정하는 권한은 각 고을의 수령이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재량권을 남용하여 세금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그 결과,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은 기준치보다 낮은 세금을 내고, 가난한 농민들은 과다한 세금을 부담해야 했습니다.이것이 바로 세종의 고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관료의 재량권을 최소화하여 부패를 줄이고, 농민들에게 공평하게 과세할 수 있을까? 세종은 기존의 '답험손실법(畓驗損失法)'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답험손실'이란 고을의 수령이 과도한 재량권을 가지고 수확량을 확인하고 조세 기준을 결정하는 방식을 의미했습니다. 세종은 이를 '공법(貢法)'으로 개혁해, 정액 세금을 매기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관료의 재량을 축소하고 부패를 줄이면 농민들의 부담이 덜어질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그러나 정액 세금은 수확량이 해마다 다르고, 평균 수확량이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 간의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 문제를 혼자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세종 9년인 1427년, 그는 과거시험 문제로 국정의 주요 현안을 묻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공법을 사용하면서 이른바 좋지 못한 점을 고치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를 통해 신료들과 치열한 토론과 논의를 전개하며 공법 개혁의 방향을 모색했습니다.
백성들의 참여: 공론화 과정과 숙의민주주의의 실현
세종은 개혁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주요 지주였던 관료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재위 12년, 세종은 공법의 찬반 여론조사를 무려 5개월에 걸쳐 진행했습니다. 이 조사는 양반 관리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백성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은 9만 8,657명이었고, 반대는 7만 4,149명이었으며, 총 17만 2,806명의 여론을 수렴했습니다.이 대규모 여론조사 이후, 세종 20년에는 공법을 시험적으로 실시했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양민 중 공법 찬성 비율이 3분의 2에 달하자, 1차 시험 공법을 시행했습니다. 이처럼 세종의 공법 개혁 과정은 활발한 공론화와 끊임없는 토론, 시범 사업까지 모두 거치는 숙의민주주의적 절차를 밟았습니다. 15세기 조선은 세금 문제라는 가장 민감한 주제를 놓고,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쉽게 이루기 힘든 합리적인 절차를 따랐습니다. 결국 세종은 재위 26년 만에 공법을 최종 제정할 수 있었습니다.세종 공법의 핵심은 고을 수령의 재량권에 크게 의존하던 기존의 답험손실 과세 방식을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정액세제인 공법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공법은 정액세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도입했습니다. 즉,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개의 등급으로 나누고, 다시 그 해 농사의 풍흉에 따라 9개 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세액을 산정하고 징수하는 방식입니다.
직전법 개혁의 배경: 사전 증가와 세조 반정의 영향
세종대왕의 공법 개혁 이후에도 조선 사회에는 여러 경제적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과전법 체제 하에서 사전(私田)의 증가가 심화되었습니다. 사전의 증가는 몇 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 관리들에게 지급된 토지가 세습되면서 사유화된 경우입니다. 본래 과전법의 목적은 관리들의 생계를 보장하면서도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토지가 세습되고 사유화되면서 과전법의 본래 취지가 퇴색되었습니다.둘째, 토지의 사유화와 매매가 성행하여 사전의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 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지자 일부 계층은 불법적으로 토지를 매입하거나 점유하는 사례가 증가했고, 이는 조세 징수의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국가 재정의 불안정을 초래했습니다.셋째, 세조 반정 이후 공신전(功臣田)의 증가입니다. 세조는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정권을 지지한 공신들에게 대규모 토지를 하사했습니다. 이는 정권의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공신전의 증가는 국가의 공공 토지인 공전(公田)을 축소시키고, 조세 수입의 감소를 초래했습니다. 공신전이 세습되면서 사전이 증가하여 조세 제도의 불공정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이러한 문제는 조정의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는 안정적인 조세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세조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전법(職田法)을 도입했습니다. 직전법은 관리들에게 토지를 직접 소유하게 하지 않고, 그 대신 수확량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하여 국가가 세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징수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습니다. 이는 사전의 증가를 억제하고, 국가 재정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 공신전의 개념
공신전(功臣田)이란, 공신들, 즉 국가에 중요한 공로를 세운 이들에게 하사된 토지를 의미합니다. 조선시대의 공신전은 고려에서 시작된 전통을 이어받아, 1391년 공양왕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이성계 등 45인의 회군공신에게 최초로 공신전이 지급된 제도는 나중에 많은 공신에게 확대되었습니다.
* 세조 시기의 공신전 규모
세조(수양대군)는 1453년에 이루어진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며, 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공신들에게 대규모의 공신전을 하사했습니다. 세조의 통치 아래에서 공신전은 크게 늘어났으며, 그 혜택을 받은 인물들의 수와 면적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규모였습니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공신전은 약 11만 5,340결에 달하며, 이는 한 결이 약 0.5ha(약 1,500평)에 해당하므로 상당한 면적입니다.
이러한 공신전은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지급되어, 특정 공신들이 세습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공신전은 농업 생산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이로 인해 그들이 정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신들에게 이러한 대규모의 토지가 하사됨에 따라, 일반 농민들은 그들의 세금 부담이 더욱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공법 개혁과 오늘날의 의미
15세기 세종대왕의 공법 개혁은 오늘날의 합리적인 세금 원칙에 비추어볼 때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세금 징수 과정이 명료해져 관료의 재량권을 제한할 수 있었고, 명확한 기준과 체계화를 통해 투명성을 확보했습니다. 무엇보다 수확량에 비례하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공평한 과세를 지향했습니다. 이 과정이 끊임없는 토론과 숙의의 연속이었으며 지방 단위에서의 시범 시행을 거쳤다는 점도 인상적입니다.오늘날에도 세금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쟁점입니다. 국민의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에 집중된 상황에서 부동산 관련 세금 문제는 민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세종대왕의 공법 개혁이 오늘날의 민주적 세금 정책에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함께할 때, 의미 있는 개혁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